10월 6일. 날씨 태풍 안녕! 나카메구로-에비스-히로오-신주쿠. 17.14km

 

우산을 사겠다고 폭우 속 시부야를 돌아다니던 노력이 무색하게, 하지만 너무나 다행히도! 태풍이 오전 중에 도쿄를 싸악 빠져나가 날이 감쪽같이 맑아졌다. 야호!

 

발걸음 가볍게♪ 나카메구로로 내려가 강가를 따라 쭉쭉 걸은 다음 땡볕 아래 다이칸야마를 거쳐 에비스까지 걷고 또 걸어서 그리웠던 아후리 유즈시오라멘을 흡입하고, 타코야키에 하이볼도 한잔하고, 히로오라는 고급진 동네도 가보고, 게이샤 커피라는 역시 고급지고 산뜻한 커피도 마시고, 다시 신주쿠로 옮겨가 생각보다 낭만적이지 않은 도쿄도청 야경 구경도 휙 한번 하고, 친절한 할아버지 덕분에 포기 않고 신우동을 찾아가 쫄깃쫄깃 우동과 탱글탱글 새우튀김도 맛보고, 고개가 절레절레, 혼돈의 카오스가 따로 없는 돈키호테를 들른 다음에 숙소로 컴백했다.

 

기어이 양쪽 발가락에 물집이 잡힌 날이었는데 정말 많이 걸었구나. 많이 걷는 건 좋은데, 지나고 생각하니 몸도 무겁고 더위에 지친 나머지 즐기며 걷지를 못했다. 목적지를 향해 가되, 오로지 이동을 위한 걷기 말고, 천천히 생각하고 느끼며 걷고 싶었는데. 그게 최고 목표였는데. ㅠ

 

 

 

 

10월 7일. 날씨 맑음. 키치조지-메구로-에비스. 11.18km

 

이날은 오전부터 저녁 무렵까지 키치조지에만 머물렀다. 키치조지는 과연 살고 싶은 동네더라. 정겨운 시장도 있고, 아기자기 예쁜 가게도 많고, 무엇보다 이노카시라 공원이 있고. 이노카시라 공원은 평화입니다. ♥

 

하루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는 G와 바이바이 하고는 에코백 집착과 책 발견 강박에 사로잡혀 쇼핑몰과 서점을 또 실속 없이 한참 왔다 갔다 하다가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 다시 이노카시라 공원을 찾았다. 아까 낮에 과학수사대가 현장 검증이라도 하듯 세심하게 추억의 벤치를 닦던 할아버지가 생각나서. 그 추억의 문구가 궁금해서. 그런데 두 개의 벤치 가운데 어느 쪽인지 모르겠고, 한쪽에는 누가 앉아 있고, 어두워서 글자도 안 보이고... 어차피 득템도 못 할 것을, 환할 때 동네를 산책하고 공원에서 평화를 만끽할걸 후회 한 바가지. ㅠ

 

몸도 마음도 무거워져서 저녁도 패스하고 일찌감치 숙소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점심에 연달아 먹은 육식, 사토우 스테이크 정식이랑 멘치가스가 너무 든든했던지 배도 안 고팠다. 먹고 싶은 게 참 많았었는데, 이상하게 아무것도 당기지가 않았다. 그렇게 메구로역에 내려 터덜터덜 숙소로 가는데 갑자기 도쿄를, 메구로를 처음 찾았을 때 그 신나고 좋던 기분이 몹시 그리워졌다. 그래서 맘을 바꿔 2년 전 첫날의 코스를 그대로 답습하기로 했다.

 

메구로에서 에비스로 이어지는 길을 천천히 걷는데 그때의 청량하던 밤공기가 희미하게 느껴졌고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똑같아서 좋았고, 달라져서 슬펐다. 내 기억 속 메구로는 마냥 환하고 깔끔하고 여유로운 느낌이었는데, 다시 찾은 메구로는 변함없긴 하지만 어쩐지 좀 낡고 바래고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써클케이도, 도큐스토어도, 이름 모를 호텔 건너편 슈퍼도, 노란 간판 미용실도, 모두 그랬다. 그리고 내 몸과 마음 역시 늙고 시들었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그날처럼 가든플레이스 벤치에 잠시 앉았다가 아후리 라멘을 먹고 숙소까지 다시 천천히 걸었다. 다시 또 도쿄에 오고 싶어질까. 아무래도 아닐 거 같았다.

 

 

10월 8일. 날씨 맑음. 메구로-산겐자야. 9.67km

 

그냥 다 의미 없는 기분이라 체크아웃 시간까지 방에서 뭉그적거리려다가 맘을 다잡고 10시쯤 숙소를 나섰다. 생각보다 경비가 부족한 바람에 코인락커 비용도 아쉬워서 호텔에 짐을 맡기고 가까운 산겐자야로 향했다. 그래, 나 버스도 한번 타보고 싶었잖아.

 

메구로에서 산겐자야로 가는 버스는 마치 마을버스처럼 좁은 동네 골목길을 따라 달렸고 나는 다시 도쿄에 오고 싶어졌다! 다시 와서 버스가 달린 길을 걷고 싶었고, 은발의 할아버지가 오픈하던 와이파이 프리 카페랑 그 옆의 아담한 밥집도 가보고 싶었다.  

 

동네를 빙 둘러 산책로가 조성된 산겐자야, 그리고 세타가야는 이 동네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수박>과 <빵과 스프...>의 느낌처럼 소박하지만 정갈하고, 잔잔하면서 따뜻한 분위기가 감도는 동네였다.

 

살면서 아마 이번에 제일 많이 본 거 같은 나비도 만나고, <수박>의 해피니스산차가 떠오르던, 셰어하우스인 듯한 집도 마주치고, 무작정 들어간 카페에서 점심을 먹으려다가 시간이 촉박해서 그냥도 나오고, 산겐자야를 검색하면 아마도 제일 많이 나올 voivoi가 걷다 보니 있길래, 치즈 팬케이크를 추천 받아 후다닥 먹고.

 

세 시간 동안 기분 좋게 아쉬운 산책을 마치고, 짐을 찾으러 다시 버스를 타고 메구로로 갔다. 그래, 도쿄에 또 오자!

 

 

+

메구로-산겐자야 하루. 키치조지 하루. 카마쿠라 하루. 코엔지. 야네센. 다이칸야마. 하라주쿠.

세타가야칸논 정류장 전쯤의 카페랑 밥집. 물청소를 하던 산겐자야 식당. 줄이 어마어마하던 키치조지 텐동집. 

규카츠. 유즈시오라멘. 쇼유라멘. 시오아이스크림. 로손 롤케이크.

평일에 공원 벤치에서 점심 먹기.

극장에서 영화 보기. -ヒューマントラストシネマ渋谷 / シネ・リーブル池袋

덥지 않고 해가 긴 봄. 최소 5박. 컨디션 주기를 고려해 일정 잡기. 새로운 동네 호텔. 하루 9천엔.

 

다음에 도쿄를 찾을 때 기억할 것들. 적어두지 않으면 지금 느낌을 까먹고, 산만하게 욕심만 많이 생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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